언젠간 흐려질거라는 말을 곱씹으며 지냈다.
난 이불이 널브러진 거실에 누워 서럽게 울고 있다. 거실 화장실은 불이 켜진 채로 문이 활짝 열려 있고, 현관 중문도 너무 활짝 열려서 티비쪽을 향해 있다.
내가 가진 내 인생의 첫 기억은 백일이 되기도 전, 언니가 너무 아파서 다급하게 병원에 가느라 나를 두고 갔을 때 깨어난 기억이다.
어릴때부터 나는 유독 기억력이 심하게 좋았다.
기억력이 좋은 걸 증명하는 방법은 동영상이 보편화되면서 쉬워졌지만, 이전에는 나의 기억력을 증명하는 방법은 많진 않았다.
발로 걸어서 다닌 길은 몇 년이 지나도 기억하고, 지도를 보지 않아도 길을 잃는 일은 외국에서도 없었다.
유치원 6살, 7살때 무슨 반인지, 유치원 구조와 통학버스 할아버지가 주시던 사탕, 유치원 놀이터에 있던 구조물 위치. 나비를 가지고 놀다가 묻은 가루.
초등학교 1학년때부터 6학년 반 번호를 기억하는 건 물론이고, 중학교 반 번호, 고등학교는 전학간 학교 반 번호도 전부 기억한다.
몇 학년때 급식차였고, 급식실이었는지…
30년이 넘게 살면서 내가 가진 기억력은 축복이 아닌 고통이라고 확신한다.
난 순간을 세세하게 당시 누가 어떤 위치에 있는지 기억하고 감정이 떠오르면서 잊을 수가 없다.
남을 용서할수도, 나를 용서할수도 없다.
매번 기억이 떠오르면 그 순간이 나를 원치 않아도 데리고 간다.
잊고 싶은 상대를 질리지도 않게 보여주고, 선명하게 보여줘서 용서할수도 없다.
잊고 싶은 나를 객관적으로 보여주며, 부끄러움과 죽고싶은 마음을 수도 없이 반복한다.
내가 왜 그랬을까. 그러지말걸. 왜 조금 더 성숙하지 못 했을까. 수도 없이 후회하게 만들고, 후회에 몸서리치게 만들며, 바꿀 수도 없는 과거에 멈추게 만든다.
늘 거짓말하는 사람을 보며 나는 기대를 버리고, 약속을 잊는 사람을 보며 실망을 잊었다.
자신이 내뱉은 말을 핏대세우며 하지 않았다고 우기는 뻔뻔함을 보며 혐오감을 키웠고,
뒤돌아서면 까먹을 말을 숨 쉬듯 내뱉는 사람을 보며 난 사람이 싫어졌다.
조금 기억력이 좋은 나는 시간이 쌓이면서 사람이 싫어졌다.
재잘재잘 말이 많고 전교생 이름을 외우던 나는 사람 이름과 얼굴을 외우질 못 한다.
누군가를 기억하는 일은 실망을 반복하는 일이니, 난 누군가를 기억하는 일을 포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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